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플레이 스타일 ==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지만 이른바 [[4대 센터]][* 한국에선 시대가 완전히 다른 1992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샤킬 오닐을 조기 은퇴한 도허티 대신 끼워넣는다. 엄밀히 따지면 워낙 [[4대 요소]]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지, MVP를 수상한 적이 있는 로빈슨, 올라주원, 오닐, 그리고 이들과 대등히 매치업했으며 수상에 근접하기라도 해봤던 유잉에 비해 도허티는 레벨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 4대 [[파워 포워드]]들이었던 [[팀 던컨]], [[케빈 가넷]], [[크리스 웨버]], 라쉬드 월러스도 마찬가지. 나머지 셋은 각각 퍼스트 팀 경력이 있으며 MVP거나 이에 근접한 적이 있는데 월러스는 올-NBA 서드 팀도 없다. 사실 실력으로 따지면 이때 이미 월러스보다 훨씬 좋은 선수였던 [[디르크 노비츠키]]가 꼈어야 했지만 노비츠키는 2004-05시즌에야 첫 퍼스트 팀에 오를 정도로 기량이 정점에 오른 시점이 늦은데다가 이상하게 한국팬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떨어졌다. 쉬드가 워낙 말썽꾸러기 팀인 포틀랜드의 에이스로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녀 주목도가 높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던컨이 원탑에 가넷/노비츠키가 서로간의 우열없이 약간의 차이로 다음, 그 밑에 웨버에 한참 밑에 월러스를 놓는게 일반적인 평이다.]라고 불리는 센터 중 하나이다. NBA에서 83~87년 5시즌 연속으로 드래프트 전체 1위로 지명된 특급 센터 중 1명으로[* 224cm의 엄청난 키에도 뛰어난 스피드로 휴스턴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불과 3시즌만에 무릎이 망가지며 단명한 1983 드래프트 1순위 랄프 샘슨, 그 랄프 샘슨과 트윈 타워를 이루었으며 화려한 피벗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인 1984 드래프트 1순위 하킴 올라주원, 1985 드래프트 1순위 패트릭 유잉, 부상으로 롱런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패싱센스와 득점력을 보여준 86년 전체 1위 [[브래드 도허티]], 빠른 스피드로 페이스업과 속공을 즐기는 1987 드래프트 전체 1위 [[데이비드 로빈슨]]으로 이어진다. 단, 로빈슨의 NBA 데뷔는 해군 의무복무를 마친 89년이다.], 유잉은 파워, 스피드, 테크닉 등 어느 카테고리에서도 독보적인 우위를 가진건 아니었지만 기본기에 충실하고 골밑 안정감이 뛰어나 센터의 교과서이자 이상적인 모델로 불린다. 부상과 노화로 인해 파워 센터의 이미지를 다소 상실하긴 했지만 샤킬 오닐이 등장하기 전까진 당대 올스타급 센터 중 가장 파워가 강한 축에 들어갔으며, 실제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커리어 전성기때는 큰 보폭으로 치고 들어가는 드랍 스텝에 이어 바로 덩크로 찍어버리는 공격루트를 많이 보여줬다.[* 오닐처럼 다른 센터들을 미스매치 수준으로 압도하는 힘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중거리슛과 러닝/점프훅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를 이용한 공격을 펼쳤다. 실제로 오닐처럼 중거리슛이 전혀 없고 극단적으로 골밑에만 치중하는데도 경기당 30점 가깝게 때려박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고, 중거리에서 득점을 못하는 선수는 골밑으로 오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기에 S급 센터에겐 미들 정도는 필수였다. 그러나 오닐은 워낙에 압도적인 힘과 사이즈 및 체급대비 엄청난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라 이게 가능했던 것. 그리고 공격범위가 좁아서 그렇지 골밑에서의 득점감각과 기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 무릎 부상 이후로는 공격의 다변화와 골밑 공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드레인지 슈팅을 장착하였는데, 유잉의 슛은 릴리즈 포인트가 높은데다가 릴리즈 순간을 의도적으로 매우 늦게 가져가 상대 선수가 알고도 블로킹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비거리까지 매우 길어 3점 라인 근처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으며 심심찮게 3점슛까지 꽂아넣을 정도였다. 이 미들점퍼 하나만큼은 4대 센터 중에서도 단연 탑으로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덤으로 센터 중에서도 매우 정확한 핑거롤과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 슛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투스텝 돌파를 제일 잘 쓰던 선수이기도 했다.[* 보폭이 매우 넓기 때문에 크게 스텝을 두번 밟으면 3점라인 부근에서 골밑까지 돌파가 가능했다. 유잉의 파워가 빛났던 게 이 부분으로, 파워가 딸리는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하면 수비벽에 꼴아박는 셈이라 볼을 흘리기 십상이다. 물론 파워가 딸려도 스피드로 돌파하는 케빈 가넷, 케빈 듀란트, 야니스 아데토쿤보같은 장신들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퍼스트스텝에 이은 돌파는 스윙맨처럼 운동능력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이 쓰며, 실제로 위 세 선수들 중 아데토쿤보와 듀란트는 사실상 스윙맨의 운동능력이었으며 가넷도 당시 기준 스몰포워드에 필적했다. 즉, 상대적으로 둔할 수밖에 없는 센터들은 그다지 쓰지 않는 옵션인데, 유잉의 경우 스피드는 빠르지 않지만 당시 센터들 대부분은 그의 어께빵에 견뎌내기 힘들 정도의 파워를 지녔기에 이를 바탕으로 강하게 돌파해 들어가면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물론 샤킬 오닐처럼 파워부터 유잉을 압도하는 상대에게 통하는 기술은 아니었으나, 유잉은 이것 외에 기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후술하는 것처럼 (노화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까지는) 오히려 그를 상대로 앞서면 앞섰지 밀리진 않았다.] 최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는 다른 4대 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운동능력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 속공농구에도 제법 강세를 보일 정도였다. 특히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과의 호흡이 환상적이어서 잭슨과 함께 뛰던 90 시즌엔 경기당 무려 28.6점까지 올리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퍼스트 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91-92 시즌부터 득점력이 25점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기량의 저하는 아니고 이때부터 부임한 감독 [[팻 라일리]]가 기존 스튜 잭슨 체제의 빠른 농구를 버리고 수비 위주의 느린 페이스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과 프로 시절의 유잉이 가장 다른 점은 민첩성, 순간 움직임이다. NBA에서 유잉은 운동능력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였지만 동시대 라이벌인 로빈슨, 올라주원, 오닐에 비하면 아무래도 떨어지는 운동능력이었다.[* 하킴은 벌크업을 하기 전엔 매끈한 몸과 미친듯한 운동능력으로 흑표범이라 불리곤 했고, 로빈슨은 역대 센터들 중 최상단에 놓이는 스피드를 자랑했다. 체급 대비 운동능력은 역대 최고수준이었던 오닐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런데 놀라운 건 이게 대학 시절과 초창기에 무릎 부상을 자주 당해 하락한 운동능력이라는 것.[* 실제로 닉스시절 유잉의 영상을 보면 항상 두툼한 무릎보호대를 차고 있다.] 부상 전인 대학 시절 유잉의 모습을 보면 NBA에서 영리하게 농구하던 유잉의 모습과 달리 힘, 스피드, 점프력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파워풀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닐은 은퇴 후 여러번 밝혔듯이 어린 시절엔 유잉이 그의 우상이었고, 오닐의 라이벌이자 드래프트 동기, 유잉의 대학 후배이자 절친인 알론조 모닝 역시 유잉을 좋아했는데, 둘 다 대학 시절 유잉의 플레이에 반한 것이다. 그만큼 대학시절 유잉은 시원시원한 야수같은 플레이어였다.[* 신입생이던 82년 NCAA 결승에서 그는 전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던 제임스 워디에다가 샘 퍼킨스, 1학년 마이클 조던 등을 상대로 무려 4블록을 기록했다. 더 무서운 건 골텐딩이 무려 5개. 게다가 이 골텐딩은 한창 때 자베일 맥기가 그랬던 것처럼 택도 없이 한 멍청한 플레이가 아니라 블록이 될 수도 있었던 걸 간발의 타이밍으로 놓친 플레이였으며, 이중 일부는 블록처럼 보이는데 골텐딩만 이렇게 많이 불렀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대학 중 최강전력이던 UNC 선수들이 슛을 쏘는 족족 뛰어올라 9번이나 쳐냈다는 얘기로, 그의 괴물같은 민첩성과 점프력을 볼 수 있다. 훗날 NBA 슈퍼스타가 되는 알론조 모닝과 샤킬 오닐이 유잉의 팬이 된 것도 이때였다. 대학시절 유잉은 웬만한 NBA선수들을 능가하는 스타였으며, 다이나믹하고 파워 넘치는 플레이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지속된 부상은 그의 운동능력을 많이 앗아갔고, 프로 중반부터는 무릎이 워낙 안 좋아서 재빨리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성에 비해서 리바운드가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리바운드(특히 공격 리바운드)는 높이도 중요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프로시절 유잉은 좀 굼뜬 편이라 높이나 파워에 비해 그렇게 잘 잡는 편은 아니었다. 수비의 경우 라이벌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에 비해선 한 끗 떨어지는 편이었다.[*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에 불과해 은근히 과소평가받는게 있는데, 4대 센터는 공격보다 수비력이 더 괴물들이었다. 올라주원과 로빈슨 모두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자이며 동시대엔 수비로 따지면 이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디켐베 무톰보]]까지 있었다. 90년대 센터 부문 경쟁이 얼마나 빡셌냐면 1999년, 2000년에 수비왕 2연패를 한 [[알론조 모닝]]이 이들한테 치여서 데뷔 후 6년 동안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한번도 못 오를 정도였다! 유잉이 그나마 89년과 92년에 올라주원을 제치고 세컨드 팀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 것.] 그러나 기본적으로 높이[* 유잉의 신장은 7피트에 못 미쳤다는게 중론이다. [[야오밍]], 무톰보와의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당시 야오와 무톰보는 휴스턴에서 선수로, 유잉은 코치로 있었다) 무톰보가 "사실 패트릭 키는 6피트 9인치(206cm)"라고 언급하자, 유잉이 "내가 6-9일지 모르겠지만 터프한(bad) 6-9이야"라고 되받아친 적이 있다. http://www.si.com/vault/2005/03/14/8254880/dinner-at-yaos 그러나 그는 윙스팬이 8피트에 가깝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길었다.]와 파워를 둘 다 갖추고 있어서 1대1 수비에서 매우 강했으며, 올라주원이나 로빈슨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센스가 매우 뛰어나서 도움수비를 포함한 팀 수비에서도 일급이었다.[* 마이클 조던이 1991 파이널에서 [[존 스탁스]]와 찰스 오클리의 더블팀을 스핀무브로 말 그대로 농락하고 유잉에게 멋진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꽂은 전설적인 장면은 유잉에게 굴욕 장면으로 남아있지만 자세히 보면 두 동료가 베이스라인에서 털리고 그 발빠른 조던이 골밑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만에 골밑을 사수해서 블록하기 직전까지 갔다.] 특히 시리즈 30블록을 기록했던 1994 파이널에서 휴스턴 선수들이 골밑으로 들어오는 족족 신들린 듯 쳐내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닉스는 90년대 최강의 수비팀이었으며, 이 팀에서 최고의 수비수이자 팀 수비의 핵은 바로 유잉이었다. 실제로 유잉은 루키 시즌부터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는 선수였지만, 그가 데뷔할 당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그를 "수비 전문 선수(defense specialist)"라고 부르고 있으며 "프로농구가 공격력을 보이는 시대가 된 마당에, 압도적인 수비력을 통해 게임을 지배하는 유잉의 능력은 흔치 않은 자산이다"라고 설명했다.[* http://www.nytimes.com/1985/09/29/magazine/patrick-ewing-and-the-art-of-defense.html?pagewanted=all] 프로데뷔 이후에도 유잉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수비력이었다. 공격의 경우 다른 4대 센터들과 비교해서 가장 부족한 건 1대1 능력이다. 유잉의 경기를 보면 의외로 파워로 상대방을 압도해 득점을 넣는 장면은 별로 없다.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 훅슛과 페이더웨이가 있긴 하지만 주무기로 삼을 만한 건 아니었고, 주로 패스를 받아 점프슛을 넣는 편. 물론 그렇다고 1대1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샤킬 오닐]]처럼 매치업을 압살하며 30점을 넣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참고로 1대1 능력이 떨어진다느니 1대1 주무기가 없다는 건 센터들이 30점에 가깝게 넣으며 MVP 랭킹 상위 5인 중 4인이 센터일 정도로 수준이 전체적으로 미친 듯이 높았던 90년대 기준이다. 센터들의 기량이 당시에 비해 전체적으로 떨어지는 2000년대 이후 기준으로 유잉의 골밑 공격력과 1대1 능력은 센터들 중엔 야오밍과 2000년대 중반 까지의 샤킬 오닐, 사실상 파워 포워드였던 전성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정도를 제외하곤 누구도 상대할 만한 선수가 없다. 사실 전성기에 득점랭킹 리그 3위까지 올렸던 유잉이라면 오닐을 제외한 나머지 둘울 포함해도 최고 자리에 놓일 만하다.] 유잉이 새가슴이라는 오해를 받은게 공격에서 이른바 "폭발"하는 경기가 별로 없어서인데, 사실 유잉은 꾸준히 득점을 하는 선수지 마구 퍼붓는 스타일은 아니다. 매 경기마다 감이 좋은 날은 35득점, 컨디션이 나빠도 20득점은 꾸준히 올려주는 스타일로 이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센터 포지션으로는 최상급의 공격력이다. 게다가 유잉은 새가슴이라는 오해와 달리 승부가 결정되는 위닝샷이나 클러치 샷을 꽤 많이 넣을 정도로 상당한 강심장이다. 그런데 의외로 결정적인 순간에 레이업을 놓친 적이 몇 번 있는데 가장 큰 실수는 1995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최종 7차전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으로 만들수도 있었던 핑거롤을 놓친 것이다. 이 핑거롤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닉스는 시리즈에서 탈락해버리고 말았는데, 아이러니하게 유잉의 핑거롤은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위에 언급된대로 라이벌들에 비해 운동능력이 떨어지다보니 골대 근처에서 "내려놓는" 로빈슨이나 올라주원, 아예 덩크를 찍는 오닐과 달리 손끝 감각에 의존해 "던지는" 편에 가까웠는데, 이러다보니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 사실 긴 팔과 큰 키에 비해 상당히 작은 손 탓에 레이업을 잘하기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물론 진짜 작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농구공을 소프트볼처럼 잡는 빅맨들에 비해) 이 때문에 공을 흘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디펜시브팀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S급 수비력[*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알론조 모닝은 수비왕 2연패에 빛나지만 7년차가 된 1999년이 되어서야 올-디펜시브 팀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자기보다 5살이나 많은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1998년까지 매년 밀렸다. 그런데 올라주원은 수비력이 로빈슨과 최소 동급인 선수인데, '''그 올라주원을 전성기 때 올-디펜시브 팀에서 밀어냈던게 유잉이다.''' 유잉도 1990년대만 피했다면 수비왕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그는 공격도 잘 했지만 무지막지한 수비력으로 1픽을 먹은 선수다.], 한 때 리그 득점리더 3위를 기록했으며 몸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진 평균 20득점대를 일관적으로 유지했던 공격력, 명성에는 다소 못미치지만 그럼에도 준수한 축에 들어가는 리바운드 능력을 가진 센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